2013. 2. 26. 01:01 예술/영화
페스티발 (2010)
<천하장사 마돈나> 이해영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작품. <천하장사 마돈나>는 해진 기억 덕에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사춘기 소년의 성정체성에 대한 심각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재미나고 유쾌하게 풀었던 영화로 좋게 기억하고 있다. <페스티발>도 이런 감독의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난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집단 커밍아웃 영화"라고 한다. 이야기는 세 커플과 한 사람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펼쳐진다. 1
지극히 평범한(?) 젊은 커플 - 장배 & 지수
이 커플의 첫 등장 장면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열심히 섹스를 '해주는' 장배와 못마땅하다는 듯한 지수. 자신의 남성성을 열심히 뽐낸 장배는 스스로의 남자다움에 도취한다. "좋았지?" 그에게 섹스란 남성성의 확인이라는 측면이 큰 듯하다. 남근의 크기에 집착하는 그의 모습은 남성성을 자랑하고 싶은 장배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지수는 승진에 떨어진 장배를 생각하는 마음에 한동안은 참고 받아 준다. 하지만 지수는 어머니 세대와는 다르다. 장배의 욕구 충족을 위해 포기한 자신의 욕구를 남몰래 '적극적으로' 충족한다. 2 그걸 목격한 장배가 '멘붕'하는 것은 당연지사. 장배는 이 충격적인 장면을 해석하길 자신의 '성기가 작아서'라고 지극히 남성중심적인 해답을 내려놓는다. 사실 지수가 원한 건 배려와 사랑의 마음이었는데.. 한번 어긋나기 시작한 둘은 지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헤어지고 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장배가 방을 빼면서 한 사소한 마음씀씀들-지수가 그렇게 원했던 것-이 둘을 다시 붙여놓는다. 3
장배와 지수는 현 시대의 젊은 커플들이 오래 사귀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버지 세대로부터 남성중심의 사고를 물려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세상에 사는 장배와, 이런 남자를 위해 참고 배려할 줄 알지만 자신의 욕구는 챙길 줄 아는 똑똑한 지수.
나대로 살고 싶다 - 순심 & 기봉
순심은 죽은 남편 빚 갚기와 아이 뒷바라지에 일생을 바쳐왔다. 희생만 하고 살아온 어머니 세대의 모습의 전형이다. 그러던 어느날, 떨어진 벽걸이 액자를 보며 순심은 그동안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순심이 살아온 모습을 보여주는 액자, 그리고 그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액자 모양의 벽에난 자국. 그리고 맨 위에 뻥 뚫린 못박은 자리가 순심의 휑한 가슴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열심히 살아왔으나 정작 순심 자신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순간 회의가 일었으리라.
그러다 그녀는 SM..이라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살면서 처음으로 자신답게 살려고 시작한다.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곱게 화장을 하며 스스로에게 '이쁘다..'라고 말하는 순심. 은근하게 철물점 홀아비를 꼬셔서 함께 본격적인 SM플레이를 남몰래 즐기지만 완전히 쉽지만은 않다.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고 민원이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하이힐과 섹시한 옷을 입은 순심은 단아하게 한복을 입고 있을 때보다도 훨씬 생기넘치고 그녀답다.
뉴스에 나올 법한 이야기들 - 상두&자혜
자혜는 순수한 여고생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데, 자기가 입은 속옷을 팔아 용돈을 벌기도 하며 상두를 좋아해서 같이 자달라고 떼쓰기도 한다. 오뎅파는 상두의 이야기는.. 일종의 반전이었다. 자혜의 적극적 대시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에 게이인가? 하다가도 매일 속옷 가게에 들르는 것을 보고 성정체성이 여잔가? 했는데.. 리얼돌을 사랑하는 남자라니! 뉴스에서나 들어본 이야기다. 상두의 비밀을 알게된 자혜도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며 인형의 뺨따구를 갈긴다.
입었던 여자 속옷을 사는 사람들이나 상두의 리얼돌 사랑은 세상엔 참.. '이런 방식으로 성적 욕구를 채우는 사람도 있구나'하는 걸 보여준다.
무의미한 일상에서의 탈출 - 광록
광록은 점잖은 가장이지만 가족과 별다른 소통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속에 홀로 소외되어 살아간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속옷을 입고 커플이라고 웃어넘길 정도로 일상에 잠겨있다. 그걸 본 광록이 이쁜 속옷을 선물하지만 아내는 좋아하면서도 참 무미건조한 반응이다. 아내와 아들이 외출해 심심해하던 광록은 아내가 입지 않는 그 속옷을 자신이 한번 입어본다. 아내도 내 속옷 입는데 나라고 못입겠냐, 이런 마음이었을까? 그런데 웬걸, 무미건조한 일상에 작은 파문이 생겼다. 그때부터 광록은 이전과 같은 일상에 아내 속옷을 입음으로써 일탈의 즐거움을 맛본다.
이 영화의 평은 참 극과 극이다. 저급한 표현에 변태들만 나오는 재미도 없는 영화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즐겁게 봤다고 호평하는 사람도 꽤 있다. 소재랑 표현들이 좀 낯설어서 이런 부분들 때문에 영화가 주는 메세지들을 놓쳤다면 혹평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는 한다. 나는 나름 재미있게 봤는데, 영화에서 주는 메세지가 다양하면서도 일관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주인공들이 사는 지역은 '안전하고 살기좋은 서울만들기 운동'시범 지역이다. 그런데 무엇이 안전하지 않은 것이냐는 질문에 서장은 '무질서하고 불건전'한 것이라고 답한다. 영화는 무질서하고 불건전한 것이 과연 나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무질서하고 불건전한' 주인공들은 자기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질서'와 '건전'은 국가라는 권력이 만든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극중 순심이 한 말 한마디에 가장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람이 별게 있나 생긴대로 재밌게 살다 가면 그만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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