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15. 21:43 글과 말
박완서(2018), 박완서의 말: 소박한 개인주의자의 인터뷰, 마음산책
박완서 작가의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박완서의 '산과 나무를 위한 사랑법'이란 책은 참으로 좋아하는데, 다른 소설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것들 외에 읽어보지 않아서 앞으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완서 작가는 서울대를 중퇴하고 평범한 주부생활을 하다가 40살의 나이에 작가로 등단했다. 나도 언젠가는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주시는 분이다. 물론 그렇게 글을 쓰기까지 엄청난 것들이 축적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말 중에 글쓰는 것이랑 본래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언급이 있었다. 그만큼 글쓰기가 쉽지만은 않은 작업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러 인터뷰가 나오는 데 가장 감명깊고 마음에 들었던 인터뷰는 피천득 선생과 박완서 작가의 대화이다. 맑고 간결한 사람과 따뜻하고 잔잔한 두 사람의 아름다운 만남.
p.61
남성은 하늘이고 여성은 땅이라는 비유 역시 그 진의를 모르고 사람들은 잘못 사용하지요. 본래 비유란 항상 오류와 한계가 있는 것이므로 비유에 현혹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비유의 참뜻을 왜곡한다면 그 비유의 가치란 부정적인 것일 뿐이겠지요.
p.122
나는 언제나 그녀의 글을 대개는 두 번씩 읽는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가 있어서 내 나름의 속독으로 얼른 내용을 읽고 난 뒤에 다시 천천히 문장들을 곱씹으며 읽게 되는데, 그 때마다 그 유려하고 반짝이고 거침없는, 있을 자리에 꼭 그 단어가 들어가 박히는 그 힘이 어디서 오는가 궁금했다. 대체 이 작가는 사십이 되어 겨우 데뷔를 할 때까지 이런 걸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어떻게 참았을까.
p.123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때 글을 쓴다는 일은 아마 '꿈도 꾸어보지 않은' 듯하다. 그 세대의 보통 여성의 삶을 온종일 살았던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보통 주부의 삶을 후일 소설가가 된 이후에 자신의 가장 빛나는 자산으로 품게 되는데, 그건 그녀가 보통 주부면서 결코 보통으로 생각하거나 느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세상에 대해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내 부모, 내 남편, 내 새끼들로 표현되는, 흔히 살림만 하는 여성들이 뱅뱅 맴돌게 되는 관심사가 아니라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 전반에 대해서.
p.177
(피천득) 많이 벌면 그것 때문에 노예가 될 것 같아요. 버릴 수도 없고, 어디 기부하자니 아깝고 그럴 것 아니겠어요? 그 돈을 계산하고 관리하고 하는 데 드는 시간이나 정력이 얼마나 크겠어요. 가만 보면 돈 모으는 이들은 돈 모으는 재미밖에 모르는 것 같아요.
p.181-182
(피천득) 그래요. 형식이 아니라 그 내용이 항상 중요한 거에요. 그 알맹이만 있으면 껍질은 자연히 생겨나는 거에요.
(...)
(박완서) 그 자리에서 선생님을 뵈면서 '사람이 저렇게 늙을 수도 있구나'하고 생각했어요. 선생님의 늙음은 기려도 좋을 만한 늙음으로 여겨지니 신기해요. 저 역시 같이 나이가 들어 가면서 가장 참을 수 없는 게 추하게 늙어가는 정정한 노인들이에요. 나이가 들수록 확실해지는 아집, 독선, 물질과 허명과 정력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집착 같은 것을 보면 차라리 치매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늙음을 추잡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로부터 훌쩍 벗어나 있는 선생님을 뵈면 연세와 상관없이 소년처럼 천진난만해 보여요. 그렇게 벗어나는 일이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요. 늙음조차도 어떻게 늙느냐에 따라 뒤에 오는 사람에게 그렇게 되고 싶다는 꿈과 희망을 주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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